우계이씨(羽溪李氏)의 시조(始祖)이다. 경주이씨(慶州李氏)였는데 그 후손들이 분적하여 우계를 관향으로 삼고 이양식(李陽植)을 시조로 삼았다. 우계는 현 강원도 강릉(江陵)시 옥계면으로 과거 강릉의 속현(屬縣)이었다.
제17대 인종(仁宗) 17년(1120) 6월에 문과에 급제하여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의종(毅宗)조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까지 이르렀다. 좌복야는 우복야(右僕射)와 함께 정2품직으로 정3풐의 6부(六部)상서(尙書)와 묶어 8좌(八座)로 불렀다. 이와 같은 사실이 ≪고려사≫ 와 ≪고려명신록≫에 전해오고 있다.
제 18대 의종(毅宗)은 인종(仁宗)의 제3왕비인 공예왕후(恭睿太后) 임씨(任氏) 소생의 장남으로 1146년 2월 정묘일(丁卯日)에 나이20세에 왕위에 올랐다. 제1왕비와 제2왕비는 모두 이자겸(李資謙)의 딸로 이모이면서 왕비가 되었는데 이자겸 반란 이후 폐출되었다. 의종은 태자 시절 인종(仁宗)과 공예왕후의 불신을 받아 왕위 승계가 위태로웠으나 예부시랑 정습명(鄭襲明)의 적극적인 옹립주장으로 제위를 승계할 수 있었다.
의종(毅宗)은 즉위 후에 정사를 돌보지 않아 나라가 소란스러웠다. 의종1년(1147)에는 서경(西京)에서 이숙, 유혁, 송황등이 금(金)나라와 내통하여 반란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사형되었고 이듬해 10월엔 이심, 지지용등이 송(宋)나라 사람 장철과 공모하여 고려를 멸망시키려는 반란을 꾀하다가 송나라 도감 임대유의 고발로 체포되어 사형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반역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경계를 하지 않자 대간에서 전국 각지에서 방만한 생활을 부추기는 환관 및 내시등 측근들을 처벌헐것을 요구 하였다.
그러나 의종이 대간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좌복야 이양식(李陽植)을 비롯한 여러 문신들이 합문 밖에서 사흘 동안이나 무릅을 꿇고 항의하였다. 이 같은 신하들의 강한 요구에 밀린 의종은 별수 없이 의종2년(1148) 3월에 황관 지숙등 7명을 유배시켰다.
의종 초기에는 인종 때의 공신인 원로 김부식(金富軾과 정습명 그리고 공예왕후의 부친인 외조부 문화시중 임원후(任元厚)가 정사를 이끌었다. 이양식(李陽植)은 우국 충성심으로 항상 임금을 극간하면서 정사를 보살피다가 세상을 떠났다. 의종은 왕에 대해 간섭과 규제를하던 원로 신하들과 간언을 서슴지 않던
이양식(李陽植) 등이 세상을 떠나자 아첨을 일삼는 김존중(金存中)과 정함(鄭諴)등을 총애 하였다. 왕은 이들과 함께 매일과 같이 격구(擊毬)와 수박희(手搏戱 : 씨름)을 즐기며 ·정사를 소흘히 하였다. 심지어 어떤 때는 4일간이나 줄곧 족구를 관람하여 아예 정사를 돌보는 편전(便殿에 나가지도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의종의 이 같은 난정을 한마디로 말해서 의종24년(1170)의 정중부(鄭仲夫)의 무신정변을 예고하는 것이였다.
이양식(李陽植) 별세 후 송도에 모셔 졋으나 애석하게도 실전되어 후손들이 1982년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송악에 이양식(李陽植)의 경모비(敬慕碑)를 세우고 추모제(追慕齊)를 건립하였다. 이곳에 실전현조(失傳顯祖)의 위패를 봉안하여 매년 5월 초하루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2007년 10월에 경기도 파주시 소재 고려통일열전에 배향하였다.